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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전자제품”…고 이건희 회장의 선견지명
  • 이병문 기자
  • 등록 2020-10-27 10:07:49
  • 수정 2020-10-27 11: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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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자동차 못 이룬 꿈으로 남았지만 전장사업에서 새 성장동력 확보

르노삼성차 부산공장.

20년전 쯤인가. 자동차정비업계의 한 원로 사장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언론인 그리고 교통전문지 기자라는 직업과 관련,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 정비업체 사장은 정비업의 발전은 물론 전반적인 교통산업의 미래를 추구하는 열정적인 분이었다. 정비사 직원들의 업무 향상과 지식 습득을 위해 교통전문지를 구독하게 할 정도였는데 언젠가 직원들이 전자전문지로 바꿔 달라는 요청이 있어 신문을 바꿔주었다고 한다. 

 

자기네들에게 직접 도움이 되는 전문지는 ‘교통’보다는 ‘전자’라는 것이다. 이때 이미 자동차정비 현장에서는 ‘자동차는 전자제품’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당시 교통전문지 기자로서 신선한 충격을 받고, 언론의 역할이나 가야 할 방향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일궈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별세했다. 고 이건희 회장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를 접하면서 “자동차는 전자제품”이라는 그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20년전 취재 현장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에게 자동차 사업은 꿈이자 필생의 도전이었지만, 삼성자동차는 삼성이 진출했다가 가장 크게 실패한 사업으로 꼽힌다. 

 

유년시절부터 자동차에 심취해 있던 이 회장은 자동차를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마니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자동차사업에 뛰어드는 동기가 됐다고 일부 언론들은 지적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이 회장은 1997년 에세이에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을 거의 다 만나봤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며 자동차 산업에 대한 깊은 애착을 드러냈다.

 

에세이에서는 앞으로 자동차와 전자제품 간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회장은 “오늘날 자동차는 부품 가격으로 볼 때 전기전자 제품 비율이 30%를 차지한다. 물론 누구도 자동차를 전자제품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이내에 이 비율은 50% 이상으로 올라갈 전망이다”라고 썼다.

 

이어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과연 자동차인지 전자제품인지가 모호해진다. 그때 가면 아마 전자 기술, 반도체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자동차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자동차가 스마트폰과 같은 하나의 전자제품이라는 발상이 보편화된 시점이 2014~2015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20년을 앞서는 선견지명을 보여준 것이다. 

 

이 회장은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해 자동차 시장에 출사표를 던질 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자동차를 잘 안다고 자동차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자동차는 10년 후 20년 후에도 삼성이 먹고 살 사업이라는 판단이었다. 앞으로 5∼6년 동안 10조원을 자동차에 투자해도 이익은 거의 안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자동차사업 발전을 위해 10조원을 기부한다는 자세로 사업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자동차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동차 사업에 진출해 실패했다는 식으로 폄훼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이 회장은 이미 25년 전 전기차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자동차를 삼성의 장기 성장계획의 큰 축 중 하나로 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회장은 기아차 도산 사태와 IMF 외환위기까지 닥치면서 결국 삼성자동차를 포기했지만, 삼성그룹은 전기차 배터리와 전장부품 사업에 진출해 자동차 관련 사업을 삼성그룹 미래 성장동력의 한 축으로 키우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은 지난 2016년 미국 전장 기업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원)에 인수하면서 전장사업에서 새 성장동력을 확보했다.

 

삼성SDI는 전기차 배터리(2차전지)를 생산하는 대표 기업으로, 다가올 전기차 시대를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SDI는 올해 1~8월 세계에서 판매된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자동차사업은 이 회장의 못 이룬 꿈으로 남았지만 글로벌 사업가로서 그의 탁월한 미래감각과 자동차사업에 대한 그의 깊은 애착과 의지와 노력, 열정, 전문지식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자동차사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폄훼해서는 안된다.

 

고 이건희 회장의 명복을 빈다.

 

이병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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