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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대표 - 서부산재활용센터 - 리더(leader)는 가슴으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진정한 리더십 보여줄 수 있어야
  • 기사등록 2015-09-14 14:23:10
  • 기사수정 2015-09-14 14: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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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대표


서부산재활용센터·사하재활용센터




 

경험 없어도 처음 시작하는 사업마다 성공한 비결


 

“열정, 끈기, 지혜만 있으면 세상 어떤 일이라도 안 될 것 없습니다.”




리더(leader)는 가슴으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진정한 리더십 보여줄 수 있어야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계층 고착화와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없는 사회구조적으로 폐쇄된 시스템에 대한 탄식이 시작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높은 청년 실업률 수치와 인생의 주요한 활동을 포기한 세대들의 무기력함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된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어쨌든 생존을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구조적 해결에 대한 사회 전체의 논의와는 별개로, 개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우리가 사회의 원로나 선험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중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고비를 훌륭하게 살아내고 후대에 귀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부산재활용센터·사하재활용센터 김흥수 대표는 전 세대의 치열했던 삶을 고스란히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오늘의 젊은이들이 선배들의 삶에서 무엇을 취해야 할지 그의 삶을 통해 웅변하고 있다.




IMF 딛고 일어선 부산 최고의 재활용센터

부산광역시 감전동에 위치한 서부산재활용센터와 구평동에 있는 사하재활용센터에 들어서면 400여 평의 너른 매장에 사무집기, 가전제품 등 깨끗이 손질된 중고 물품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법원에서 경매로 나온 물건들도 구입할 수 있다. IMF때 거래처들의 부도로 그때까지 일군 사업과 부를 통째로 몰수당한 김흥수 대표가 15년 만에 일궈 놓은 재기의 빛나는 산물들이다.

“발달한 산업 기술 덕분에 성능 좋고 견고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중고제품이라 해도 새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 오랜 경기 침체로 재활용 물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구매자들도 많습니다.”

김흥수 대표는 인류가 지속되는 한 재활용 물품의 거래는 영원할 거라며, 아무런 정보와 경험도 없이‘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 하나로 사업을 시작하던 때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도전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 돕고 싶다고 한다.

김흥수 대표는 현재 국제로타리3661지구 부산대양로타리클럽에 소속돼 있으면서 로터리지구 연수위원과 총재지역대표로 위촉 돼 지역구 클럽관리와 각 클럽회장, 지구 임원, 신입회원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페이퍼 강의가 아닌 인생의 현장감이 생생히 살아있는 재미있는 강의로 기립박수를 받는 등 여느 유명강사 못지않게 인기와 호응도가 높다.

“저 역시 로타리 활동을 하면서 수차례 연수를 받고 있지만 그때마다 연수 상황을 보면 강사는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청중석에서는 반 이상이 졸고 있는 겁니다. ‘좀 더 재미있고 멋진 강의를 하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해에 연수위원을 자청했습니다. ‘해보겠다!’고”

자청해서 해보겠다고 했던 김흥수 대표의 행동에서 지금까지 그가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김흥수 대표는 치열했던 그의 인생 여정에서 타의에 의한 몇 번의 좌절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훌륭히 재기했고 지금은 자수성가한 CEO의 모범이 되고 있다.



 

초등학교 마치고 형님 뒷바라지

포항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태어난 김흥수 대표는 당시 한국전쟁의 여파를 겪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대결해야 했다. 부친의 큰 병으로 인하여 집의 생활 형편은 어려워지고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휴학을 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한 삶의 고통은 그를 일찍 철들게 했다. 다행히 이듬해 부친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복학을 하고 초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두뇌가 명석하고 영리했던 그는 중학교시험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이미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형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그 시대는 맏아들에게 집안 흥성의 모든 것을 걸고 공부를 시키던 시절이었다. 형제 중 가장 공부를 잘했지만 가장 학력이 없는 이유다.

“가난했지만 교육열이 대단하셨던 부친이 저를 중학교에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시다가 결국 포기하고 ‘형을 뒷바라지 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나이 열다섯 살,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객지 생활을 하며 돈을 벌러 다녔어요. 강원도 주문진으로 고기 잡으러 가기도 했고 어느 곳이든 돈 되는 일만 있으면 찾아다니며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악착같이 일했죠. 힘든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18살이 되던 1968년쯤 부산에 배를 타러 갔다. 그때부터 김흥수 대표의 연고지는 부산이 됐다. 1972년에 군입대한 김흥수 대표의 당시 월급은 800~1,200 원이었다. 그 돈을 모아 어린 동생들 학비에 보태 쓰라고 보내며 갖은 고생을 다했으나 군복무 중 제대 한 달을 남겨두고 부친이 돌아가셨다. 김흥수 대표보다 1년 먼저 제대한 그의 형은 일등 항해사로 외지를 떠돌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고, 그 무렵 형은 스페인에 있었다. 수습은 김흥수 대표의 몫이었다. 망연자실한 어머니를 비롯해 어린 동생들 4명이 있는 집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을 도와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원양어선을 탔으나 유독 김흥수 대표에게 운명의 신은 가혹했던지 1년 만에 척추디스크를 앓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6개월을 투병생활 했어요. 수술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했는데 당시 척추의술이 지금처럼 좋지 않아서 불안하더군요. 그냥 퇴원해 포항에 가서 2년간 좋다는 민간요법은 다 썼습니다. 무모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거뜬하게 사회활동을 해왔네요.”

힘든 투병생활이었지만 그의 인생에 엄청난 소득이 있었다. 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하던 현재의 부인 정순달 씨를 만난 것이다.




맞춤 의류 가게로 시작해 단체복 주문 받아 성장

결혼을 하려면 직업이 있어야 해서 가지고 있던 돈과 차입을 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맞춤 의류 가게를 차렸다. 비로소 김흥수 대표에게도 여명이 비치기 시작해 2년 만에 사업이 흥성했다. 호텔이나 사무실 등의 단체복 주문을 받았는데, 의류 디자인이라곤 해본 적 없는 그가 손수 디자인 한 것이 소위 ‘먹혔던’것이다. 그런데 그런 성광도 잠시, 다시 척추디스크가 재발해 단칸방에서 5개월을 투병해야 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아들 하나, 김흥수 대표는 그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었으며 집안의 유일한 근로자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이 ‘계약 만기니 나가라’고 통보한 것이다. 그렇게 1년 이상 척추병으로 수입 없이 지내니 다시 어려움이 시작 되었다.

다시 일어서야 했다. 척추가 좀 나아지자 김흥수 대표는 덤핑 옷을 가져다 리어카에 싣고 거리에서 호객을 하며 팔았다. 힘든 나날이었다. “얼마나 힘들어 보였으면... 포항에 계신 형님이 저를 보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라고 말씀하시던 형님이 3일후에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상상조차하기 싫은 비보를 받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포항까지 가는데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 후 김흥수 대표는 집안의 장남 아닌 장남 노릇을 해야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예전의 그를 믿고 단체복을 주문하려는 곳이 있어 집을 사무실 삼아 겨우 거래하기도 했다. 와중에 딸이 태어났다. 딸과 함께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도 유명한 부산의 코모도 호텔에서 단체복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

“지금도 딸을 저희 집안의 복덩이로 생각합니다. 그 주문 이후 더 유명해졌지요. 부산, 경남, 때론 제주, 경주에서도 호텔 유니폼 및 오피스복 주문이 들어왔으니까요. 서울국제복장학원장이 유니폼 샘플 제작하는 것을 의뢰하러 두 번이나 저를 찾아올 정도로 잘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체 브랜드로 직접 디자인하고 주문제작을 했어요. 지금은 유명해진 배우들이 그때 모델을 서기도 했습니다.”

한창 사업이 상승기류를  때 김흥수 대표는 의류회사를 지인에게 넘겼다. 사무자동화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가운을 입는 여직원들이 줄고 있는 현상을 촉수가 예민한 그가 간파한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한 차례의 시련이 남아 있었다. 바로 IMF였다.

“거래처의 어음이 부도나 휴지조각이 되고 빌려 줬던 돈도 회수가 안 되니 별다른 대책이 없더군요. 다시 빈털터리가 됐는데 그때 나이가 47살이었어요.”

담담히 과거를 밟아가던 김흥수 대표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이어 목도 살짝 메였다. 꿋꿋이 버티고 살아온 지난 일들의 회상이 그의 가슴을 잠시 여리게 만들었던 듯하다.




정수기 영업으로 전국 판매왕 1위 등극, 재활용 센터 인수

사장만 하던 그가 한 정수기 회사의 영업을 시작했다. 운명이 아무리 그를 강타해도 강인하게 맞서는 그에게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업을 배워본 적도 없던 그가 두 달 반 만에 1억 원의 실적을 달성했다. 곧바로 팀장이 되었고 전국 판매왕 1위의 타이틀을 거머쥐며 부산 상공회의소에서 성공사례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입사 후 5개월 반 만에 특진으로 지부장에 임명되고 10개월 만에 새로운 지부 2개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상부책임자를 마다하고 본인의 일을 위해 그 일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1년만 해본다’는 생각으로 입사했으니까 미련은 없었다고 한다.

지역정보지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본 재활용센터 매장 광고가 또다시 김흥수 대표를 전혀 다른 직업으로 이끌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녀들의 뒷바라지 돈이 많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전세를 살던 집을 월세로 전환하고 가진 돈을 모두 모아 재활용센터를 인수했다.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 아들 학교 교육을 못시킨 부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다시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 시련은 김흥수 대표를 피해갔다. 그의 굽힘 없는 삶의 의지에 심술을 부리던 운명의 여신마저 감탄해 자취를 감춘 것일까. 지금 까지 김흥수 대표는 건재하다.




로타리클럽 회장하며 3개의 신진 클럽 만든 저력

김흥수 대표는 로터리클럽이 세간에 많이 인식되지도 않았던 1989년에 부산대양로타리 회원이 되었다.

“형님이 포항에서 JC봉사단체에 가입해 있었어요. 안타깝게 35세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회원들이 와서 일사분란하게 모든 일을 도와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봉사단체에 가입해 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2005~2006년 클럽회장을 맡을 당시는 신생 클럽 2곳과 부산대학교 치의대 로타랙트클럽을 창립하였다. 클럽회장 시절 신입회원 40명이 가입했을 때는 회원유지를 위해 자비로 방문 기념패를 만들어 그들이 일하는 사업장에 임원들과 함께 일일이 방문해 사기를 북돋웠다. 그해 부산대양로타리는 최우수클럽 상과 최우수회장 상을 받았다. 보통 총재를 모시고 있는 호스트클럽에는 최우수상을 주지 않는 관례를 깬 것이다. 그만큼 김흥수 대표의 리더십은 탁월했다. 그는 “로타리클럽의 회장은 이마가 아닌 가슴으로 땀을 흘리며 일해야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로타리클럽에서 활동하며 자신이 변하고, 많은 발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인적 교류도 활발할 뿐더러 진정한 봉사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7년 동안 회원으로 활동했으니 다른 사람을 연수시킬만한 구력은 충분한 셈이다. 하지만 단지 세월이 흘러서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한다.

“제가 제도권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공부에 대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독학으로 많은 공부를 했어요. 일기도 꾸준히 쓰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했습니다. 한번은 친구가 불교대 2년 과정을 해보라고 했는데 입장이 난처했지요. 왜냐하면 고졸 자격자에 한하여 등록자격이 주어졌으니까요. 고민 끝에 형님 졸업증명서를 고쳐서 밀어 넣었죠. 다행히 합격하여 총학생회 문화부장으로 많은 활동을 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 가서 한마디 할 수 있는 지식이 생겼나 봅니다.”

그것뿐일까. 김흥수 대표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가 이미 강연의 텍스트가 돼 있는 셈이다.



 

아버지로서의 본보기... 열정과 끈기, 그리고 지혜

김흥수 대표가 인생을 채워가는 방식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 늘 그래왔다. 어린 나이에 돈을 벌었고, 남들이 늦었다 하는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공부도 그렇다. 독학으로 누구 못지않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뒤늦게 검정고시를 치렀다.

“아들 녀석이 감정평가사 공부를 하는데 경쟁이 치열해서 힘들어 하는 겁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용기를 주고 본보기가 될 만한 힘을 실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61세의 나이에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했고, 역시 1년 3개월이란 단기간에 당당히 합격했다. 형님 슬하의 조카 형제를 모두 4년제 정규대학 공부도 시켰다. 배움이란 죽을 때까지 한다지만 젊은이들은 시기를 맞춰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김흥수 대표는 ‘요즘 일자리가 없다, 살기 힘들다’고 탄식하는 젊은이들에게 부모 그늘아래서 너무 호위호식하고 자라 힘든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약한 근성이 있다 일갈한다. ‘세상에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쉽고, 편하고, 좋은 것만 주어지는 것 같지만 잠깐일 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김흥수 대표의 생각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려는 의지만이 삶의 보답을 받는다며 김흥수 대표는 방점을 찍어 이야기한다.

“저는 머릿속에 항상 열·끈·지를 새기고 삽니다. 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는 열정, 그리고 될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는 끈기와 추진력,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발휘해야지요. 좋은 근성은 습관화시키고 버릇처럼 해야만 어느 때라도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넉넉지 못한 삶을 살아 온 김흥수 대표는 지역에 어려운 사람들을 늘 알게 모르게 도와주고 있다. 로타리클럽에서 규모 있게 봉사를 하는 것 외에도 개인적으로 크고 작게 지원하거나 후원해주는 곳도 많다. 그러나 굳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그의 삶의 철학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흥수 대표는 사회복귀가 어려워 재범의 우려가 있는 재소자의 출감 후 사회복귀에 도움을 주는 봉사에 푹 빠져있다. 그들을 위하여 뜨거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멋진 강의를 언젠가는 꼭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흥수 대표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내조 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부인 정순달 씨는 2년 전 악성흑색종 암수술을 받고 부산 근교 조용한 전원주택에서 투병중이다. “꼭 고쳐주고 말겁니다. 왜냐구요? 아직 제겐 꿈이 있습니다. 꿈은 살아있으니까요, 꿈은 꾸려는 자가 꿀 수 있는 것이 꿈이니까요. 그리고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이죠.”김흥수 대표는 또 한번 이를 꼬옥 깨문다. 아내의 건강을 위해 그는 남은 인생을 걸고 있다.

“성공한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 아름답고 후회 없이 노후를 마무리해야죠, 전국에서도 큰 규모로 손꼽히는 서부산재활용센터·사하재활용센터에 진열된 새 것 못지않게 반짝이며 가치를 자랑하는 있는 중고 물품들처럼 김흥수 대표의 삶은 언제나 자기 갱신 상태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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